월간미술 2005년 8월

현재 전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작가는 상당히 많다. <월간미술>은 국내 미술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외에서 체류하며 작품활동을 하는 한국인 작가를 발굴 소개하는 장을 마련했다. 그 첫 작가로 현재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윤희 Yoon-Hee 의 작품세계를 살펴본다. 가공되지 않은 거대한 덩어리를 발견하고 특정공간과 장소에 설치하는 그의 작업은 조각의 실존을 드러낸다.

직선의 시간에 비껴선 조각의 존재감

직선적인 시간의 밖에 : 윤희의 위치

감춰진 것보다   드러나는 것은 없다.” – 중용(中庸) 


윤희의 생활 공간이자 작업실은 프랑스 남부의 외딴 곳에 있는 오래된 축사를 손수 개수한 곳이다. 그의 조각은 이곳의 돌로 지어진 거친 아치형 기둥 사이, 판판하게 다져진 콘크리트 바닥 위에 자리잡고 있다. 이 작업실의 북쪽과 남쪽으로 난 넓은 유리창 사이로는 낮은 풀들이 자라는 바위와 돌덩어리의 야생적인 풍경이 보인다. 북쪽에서 들어오는 푸른 빛과 남쪽의 따뜻한 빛은 이 공간을 가로질러 금속 덩어리들을 휘감는다. 은빛 광채가 나올 때까지 닦여있거나 어두운 산화로 인해 무거워 보이는 알루미늄, 검게 변한 구리, 부드러운 금빛을 발하거나 깊은 붉은 색으로 물든 철, 화석이 된 나무처럼 보이는 티타늄과 번뜩이는 지르코늄, 어두운 그림자를 담고 있는 황동, 장미 빛을 띤 광택 없는 청동, 강렬한 녹색이 될 때까지 산화된 니켈, 푸른 납…이들 중 가장 가벼운 덩어리는 수백kg부터 무거운 것은 수 톤에 이른다. 대부분 수평으로 퍼져있고 바닥에서 그리 높지 않게 설치 되어 있다. 또 어떤 것은 수직으로 서 있거나 벽에 기대어 있다.

여기서는 순환적인 둥근 형태가 주를 이루지만 어떤 것들은 패어있기도 하다. 어떤 것은 물질의 밀도를 드러내는 뭉친 형태이다. 또 반구와 꼭지점 위에 서 있는 원뿔들을 볼 수 있다. 건물에서 멀지 않은 바깥에서는 더 큼직한 덩어리들을 볼 수 있다. 강력한 프레스로 압축한 강철 구(球)는 마치 바다 밑바닥에서 끌려 다닌 것처럼 닳아 있을 뿐 아니라, 부드러운 금빛 표면을 지닌 또 다른 구는상상 할 수 없는 화력이 관통하는 내부에 가득 물을 채우고 있다. 또 다른 곳에는 풀빛의 거무죽죽한 줄무늬가 새겨진 거대한 덩어리가 고인돌처럼 바위 무더기 위에 놓여있다. 그것들은 운석이나 화산에서 내뿜어 낸 용암 덩어리처럼 보인다. 심지어 어떤 것은 동물이나 식물, 인간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조각의 존재감

윤희의 조각은 연대가 없다. 그것들은 항상 거기에 있던 것 같다. 심미적 투기가 시장에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내놓는, 10년마다 주류미술이 바뀌는 그런 시대에 윤희의 작업은 유행과 매체, 미술사조들에 의해 출렁이는 직선적인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윤희가 다른 몇몇 조각가와의 연관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조각은 다른 조각을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은밀한 것이라 할지라도 참조하지 않는다. 스스로 역사화하는 것을 피함으로써 윤희는 공간에 한층 밀접하게 이어진, 훨씬 구체적인 시간적 지속 안에 위치한다.

공간과 장소, 조각을 중심으로 한 관객의 이동 그리고 그것이 놓이고, 위치하는 공간 안에서 느껴지는 그것의 존재감은 조각의 실존을 결정한다. 이 점에서 윤희는 1960년대 미국의 <아트 포럼>에 실린 <조각에 대한 노트>에서 로버트 모리스가 정의한 바에 따른 미니멀리즘의 계승자인 셈이다. 로버트 모리스는 오브제 자체는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브제 주위의 공간을 이용하는 관객과 그가 떠올리는 관념의 연관 속에서 파생되는 지각이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토니 스미스의 1.8m짜리 검은 입방체를 상기시키면서 로버트 모리스는 크기와 더불어 관객의 신체가 오브제에 대해 갖는 물리적 관계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물론 모리스의 안이 텅 빈, 질감이 없고 회색으로 칠해진 기하학적인 형태와 윤희의 육중하고 불규칙적인 덩어리들 간에는 그것들의 존재감 외에는 어떤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니멀 아트의 존재감은 거기에서 극적 효과를 볼 수밖에 없었던 마이클 프리드에게는 무척 불편한 것이었지만(<미술과 물성(objecthood)>을 보라), 윤희에게 그것은 또 다른 차원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의 오브제들은 안이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윤희의 조각들은 묵직한 덩어리들이지만 시각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관객들은 레이더처럼 이 사물들의 균질성과 집약된 물질의 양을 구체적으로 느낀다. 여기서는 오히려 아프리카조각에 대한 칼 아인슈타인의 서술을 떠올리는 것이 적절하겠다. 즉 조각에서 발산되는 존재감은 그것이 담고 있을 어떤 신성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일 뿐 아니라 조각가가 작품의 공간을 개념화하는 방식의 직접적인 결과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존재감은 오브제가 어떤 상황에 놓이거나 특정한 장소에 위치함으로써 발산된다. 윤희의 작업은 이동하고 정치(定置)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런 과정을 거쳐 윤희는 대상을 활성화하고 그것에 감동의 여운을 주는 차원을 부여한다.

여유로운 정신 


윤희는 조각(彫刻)하지 않는다. 그녀는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서 옮길 단편(斷片)들을 골라낸다. 관객의 시선을 끌어내는 정치(定置)의 작업을 통해 작가는 이 단편들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말할 것도 없이 금속은 조각의 가장 오랜 재료에 속한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주에서 가장 높은 밀도를 지닌 물체들이기도 한다. 프랑스 생디에 데 보주(Saint-Dié-des Vosges)의 분홍색 벽돌로 지어진 고딕 수도원에서 열린 전시에서 윤희는 이 우환과 함께 공간을 나누어 쓰면서 전부 15톤의 알루미늄, 철, 납, 구리 등으로 이루어진 다섯 개의 덩어리를 수도원 한쪽 화랑에 늘어놓았다. 윤희가 추구하는 존재감의 효과에 반드시 수반되는 각각의 작품이 지닌 밀도는 이 작품들에 내면성을 불어넣는다. 이 내면성은 의식을 위한 자리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밀한 관계는 마치 서로 섞여 들어가듯 세계의 감정에 이르는 통로를 만들어 낸다.


윤희는 특히 제철소와 공장들, 중공업 단지를 찾아 다닌다. 이런 철저하게 난폭한 장소에서 이 섬약한 여성은 물질들의 변형과 고온의 작용, 그리고 액체에서 고체로 변이되고 분자들의 으깨짐과 같은 원초적 사물들의 감정으로 우리를 격렬하게 실어 나르는 모든 과정을 관찰한다. 이 모든 과정 사이에서 하나의 단편이 윤희에게 자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즉 그것은 우툴두툴함, 불순함 그리고 생산라인에서 꺼내어지는 순간 산화되면서 생긴 표면의 놀라운 회화성과 함께 취급과정에서 생긴 숱한 자국과 긁힘, 갈라짐 (이것은 표면을 덮고 있는, 말 그대로 완벽한 조각이라 할 수 있다.)을 지닌 것이면서 결국에는 관객들 앞에 아름다운 도자기처럼 무한한 섬세함으로 놓이는 바로 그런 것이다. 이 선택의 행위는, 제작의 과업과는 거리가 멀고 지적으로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상당한 육체적 노력을 요구한다.


산업현장으로서의 출동, 운송과 조작(操作)의 아주 복잡한 관리, 현상(現像)-드러냄의 작업과 마무리 작업(닦기, 솔로 문지르기, 바니시 바르기들)을 가한 뒤, 마지막으로 복잡한 조작을 숱하게 요구하는 설치에 이르는 과정이 바로 그런 것이다. 아주 당연히, 간단한 선택은 종종 단순한 행위로 대체될 수도 있고 이것은 윤희가 공간을 어떻게 느끼게 만드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압축된 덩어리의 내면성 안에서이든 아니면 개방적으로 혹은 전개된 형태로 펼쳐진 물질의 외면성에서이든 말이다. 구리 덩어리를 갈아 냄으로써 그 안의 본질적 색채를 드러내거나 용해한 금속을 넓게 펼치는 것은 윤희가 규칙적으로 데생을 통해 하는 일을 조각 재료로 계속해 나가는 일과 같다. 장인답지 않은 기법으로 그려내는 윤희의 데생들은 스스로 솟아 나온 자취 같다고 묘사할 수 있다. 텅 빈 커다란 공간에 나선과 원들, 가로지르는 수직이나 수평의 검은 흐름들은 최소한의 수단으로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다. 윤희에게 데생은 여유로우면서도 집중된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일종의 자기 단련인 셈이다.

스스로자발적으로


2002년과 2003년에 제작된 청동과 알루미늄으로 주조된 원뿔들은 단단함과 연약함, 충만과 비어 있음의 대립에서 벗어나 있다. 꼭지점에 균형을 잡으면서 서 있는 알루미늄의 원뿔들은 윤이 나고 잘 부러질 것 같은 얇은 내벽으로 되어있다. 그것은 주형 안에 아무렇게나 뿌려져 뒤섞인 금속의 순간적 고형(固形)에 따라 얻어진 금속의 즉각적 다발인 셈이다. 작가 스스로 말하듯, 이 거친 작업과정은 제철업의 모든 규범을 벗어나는 것으로 원뿔의 내부에 환형(環形)과 부글거리는 형태의 어지러운 표면을 형성시킴으로써 빛을 포획하고 압축한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의 구체적 공간에 구멍처럼 패어 들어간 또 다른 공간을 탄생시킨다. <세 개의 그림자(Les Trois Ombres)>라는 작품은 의식적으로 로댕의 유명한 작품 제목을 차용하고 있다. 동일한 원추형 주형에서 뽑아 낸 세 개의 작품 – 엄격하게 동일한 로댕의 것과는 반대인- 은 이미 주물 붓기 기술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필연적으로 다른 점을 보여준다. 윤희는 금속조각의 고전적인 재료인 청동을 선택했다. 알루미늄보다 용융점이 훨씬 높은 청동은 그 때문에 밀도가 훨씬 높고, 무거우며 점착성이 강한 재료이다. 그리고 1200°C의 높은 온도에서 그것을 붓는 일은 격렬한 작업이다. 질식할 듯한 열기와 눈을 뜨기 조차 어려운 연기 속에서 작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재료도 통제할 수 없게 끓거나 폭발하며 분출한다. 검증된 기술에서 나온 것이 아닌 원초적인 물질의 요구에서 비롯되는 결과로, 그대로 나온 것이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수 톤의 덩어리를 운반하고 설치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미끄러지거나 중심을 잃는 경우에 언제든지 이런 극심한 육체적 피로와 고통, 상시적인 위험이 수반된다. 윤희에게 작품의 제작이 극단적인 과도함을 요구하지만 그것은 투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이행(移行)에 속한다. 그것은 바로 작품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고요함에 더 잘 이르기 위한 것이다. 1996년 프랑스 젠느빌리에 예술센터에서 연 전시와 2003년 대구 시공갤러리에서 연 전시는 바닥까지 하얗게 칠해진 전통적 모더니즘의 화이트 큐브라고 할 수 있는 공간에서 작품들이 무중력 공간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그 작품들이 야기하는 것은 내면적인 평화, 세계와 나누는 일종의 공모, 물질적 공간의 전개 속에 존재하는 감정, 안과 바깥 사이의 조용한 삼투 같은 것이다.


윤희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자연을 환기 시킨다. (여기서 자연은 서구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도시의 그것도 아니고 산업의 그것도 아니면 풍경에나 있을 법한 좁은 의미의 자연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자연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형태의 생성과 갱신을 일으키는 창조•변형의 내적 원칙인 것이다. 윤희의 작업은 명백한 표현 양식을 드러낸다. 그는 관점이나 의도의 독자성 대신 스스로 나오는 것을 자발적으로 오게 내버려 두면서 총체성에 도달하려 시도한다.

조각 전시와 그 내력

작업실에 놓인 작품들은 각각 개별적으로 살아 움직일 수 있고 전체 역시 같은 방식으로 일종의 타협점을 찾고 있다.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작품들의 광경은 각각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강렬하게 보여줄 뿐 아니라 작품마다 독특한 매력을 드러내고 있어 인상적이지만, 이것은 각각의 조각품을 최적의 공간적 배치를 통해 보여주는 방법은 아니다. 그러기에 윤희의 전시는 매번 중요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 중 몇몇은 예외적인 것으로, 여기에서 다시 다루어질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윤희가 제대로 모뉴먼트들을 야외에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전시를 통해서다. 가장 오래된 것은 1987년 프랑스 수도권에 있는 브레테니 쉬르 오르주(Brétigny-sur-Orge) 예술회관의 잔디에 세워진 일군의 기둥이다. 번뜩이는 18개의 거대한 검은색 강철관으로 된 이 작품은 각 변이 10m에 이르는 삼각형을 구성하고 있다. 1996년에는 거대한 산소절단기를 이용해 케이크처럼 썰어 놓은 20톤이 넘는 강철 덩어리를 파리 근교의 젠느빌리에 예술회관 마당에 설치한 바 있다. 1999년에는 브르타뉴에 있는 두르밴(Dourven)의 공원 숲 속에 항상 그곳에 있던 것처럼 풍경과 혼동을 일으키는 4톤이 넘는 거대한 강철 실타래를 가져다 좋았다. 이 세 작품은 아무런 계획 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습작도 준비작업도 없었다. 적당한 오브제를 원하는 순간에 만나기만 한다면 그것은 마치 그 자체로 자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06/07/08

500m²인 파리의 니키 디아나 마르코르 갤러리는 윤희에게 매우 정밀한 설치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90년의 <스스로(D’elle-méme)>는 여기에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름 140cm의 알루미늄으로 된 반구형 잔 세 개 안에는 타르를 칠해 바른 듯한, 상형문자를 연상시키는 자국이 나타나 보인다. <내적인 재앙(Catastrophe intime)>이라는 제목의 1987년 작품은 이상한 운명을 겪었다. 1991년 프랑스 정부가 구매하여 샤토 드와롱(Château d’Oiron)의 고급스런 수장품 목록에 오르기 전 윤희의 눈에 띄어 작품으로 선택된 직후에 도난 당했던 것이다. 불가해한 우연으로 인해 그녀는 이 작품을 용광로에 들어가기 직전 어떤 공장에서 극적으로 되찾는다.

윤희의 작품들은 모두 이런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들은 작품의 발견에 대한 것이며 다음으로는 작품들의 상이한 설치과정에서 비롯된다. 전시장소는 때로 복잡한 우회방식으로 밖에는 해결할 수밖에 없는 제한을 가하곤 한다. 그래서 <조용한 격렬함>이라는 작품을 니스의 피에르 콜트(Pierre Colt) 갤러리에 집어넣기 위해 당시 즉석에서 세운 강철 구조물을 오프닝 직전에 철거하고 다시 작품철거를 위해 재조립해야 하는 일을 해야 했다. 같은 경우로서 1996년 이브리 쉬르 센느(Ivery-sur-Seine)의 한 공장에서 열린 전시는 1톤이 조금 넘는 지름 198cm 의 알루미늄 반 구체 조각인 <미지(Inconnu)>의>라는 작품을 집어넣기에 문이 너무 작았다. 결국 이 낡은 공장의 거친 마루바닥 위에, 마치 폭풍을 만난 것처럼 표면이 갈기갈기 찢어진 또 다른 작품<잊을 수 없는(Inoubliable)>과 마주 놓였다. <미지의>는 호수 표면처럼 조용하게 일렁이는 정적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을 깊은 내성(內省)과 명상으로 초대하였다.

윤희의 가장 아름다운 전시 중의 하나는 브르타뉴의 바다를 향해 뻗은 숲으로 둘러싸인 공원 안에 예술회관으로 개조된 오래되고 독톡한 가옥인 두르벤 갤러리에서 열린 것으로, 장소 자체가 매우 놀라운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데생들은 유리창을 통해 자연광이 들어오는 갤러리에 전시되었으며 조각들은 특별히 공원에 설치하기 위해 제작되었다. 3세기 전에 세관으로 지어진 작은 집 안에는 녹은 납 덩어리가 지면에 닿는 순간의 빗방울처럼 퍼져 있었고, 매 순간 그 색채를 바꾸는 바다 위의 바위로 이루어진 곶에는 재료의 순수한 색인 강렬한 장밋빛이 드러날 때까지 연마된, 구리로 된 작은 원통형 덩어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동양/서양


윤희의 작품에서 면면히 발견되는 고유한 동양적 사고는 오늘날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 태도로서, 전통의 문제를 비구상적 방식으로 재검토하는 이우환이나 고대의 화가 혹은 시인들의 방랑을 떠올리는 김 수자의 유목주의에 윤희를 가까이 접근시킨다. 그런데 윤희의 이러한 사고는 완연이 서구적인 맥락에서 발전되어 왔다. 브랑쿠시에게서 볼 수 있는 재료의 고양과 그것의 정치(定置), 리처드 세라가 강조한 괴체의 격렬함, 스미드슨에게서 보이는 엔트로피 개념(윤희는 <ASPHALT RUNDOWN>이나 <GLUE POUR>와 같은 1969년의 유명한 작품들을 참조한다). 쿠넬리스의 인문학적 관점에 근거한 도전처럼 윤희에게는 기억에 각인된 수 많은 리퍼런스가 존재한다. 윤희를 국제적 미술의 장에서 위치시킬 때 우리는 그러한 장르의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가 오직 그녀뿐임을 깨닫게 된다. 조각은 작가가 많지 않은 장르인데다 작가들은 대부분 조각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리처드 디콘은 자신의 의도대로 재료를 구부리면서 그것에 개입한다. 우리가 윤희의 위치를 이해하기 이해서는 먼저 일종의 역설을 다루어야 한다. 즉 바네사 비크로프트가 그러하듯이 사회와 그것의 허상과 구속과 폭력에 대해 언급하기 위해 가장 작은 디테일에 이르는 모든 요소를 의식적으로 통제해야 하는 작가를 상정해야 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 정반대의 위치에서 윤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번역 ・ 유진상